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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그랜드피스투어 1기 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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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그랜드피스투어 1기 이용은 

[국제평화] 질문을 담은 여행: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미래를 사유한다면, 평화의 미래를 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역사적 경험을 마주해야 하는가?


폭력에 대한 상상은 우리를 평화 실천의 길로 이끈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의 지평을 열어가는 존재이다”라는 말은 내가 학부 4년간 역사교육을 전공하면서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자신이 경험한 범주 안에 머물기 마련이다. 무언가에 대한 잔혹함이든, 선함이 주는 깊은 감동이든 자신이 경험한 그 이상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평화는 늘 허상일 수밖에 없을까? 인간은 평화로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한 상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제한된 평화의 경험 속 평화의 지평을 열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첫 번째 행선지는 바이마르였다. 바이마르 테아테르 광장의 독일국립극장 앞 괴테와 쉴러의 동상은 18세기 독일문인에게 꿈의 도시였던 바이마르의 위상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베이지색 건물로 가득찬 바이마르를 다녀온 19세기 프랑스의 여성 문학자 스탈 부인은 독일을 ‘시인과 사상의 나라’로 표현했다. 바이마르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20세기 나치의 폭력에 가려진 ‘아름다운 나라 독일’, ‘문예의 나라 독일’, ‘문명의 나라 독일’이란 이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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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국립국장 앞 괴테와 실러 동상


그러나 바이마르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런 문명의 그림자가 존재했다. 사실 ‘그림자’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큰 인류의 참극이었던 나치의 강제노동수용소 부헨발트가 존재했다. 강제수용소의 잔혹함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도밤나무숲(Buchenwald)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부헨발트로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너도밤나무들이 즐비해 있었다. 나치 강제수용소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노동수용소와 절멸수용소다. 절멸수용소에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있다면, 부헨발트는 나치의 강제노동수용소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역사와는 달리, 가을이라 하기에는 약간 추울 수도 있는 스산한 바람과 함께 처음 본 부헨발트 수용소는 잔잔하고, 한적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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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헨발트 수용소 정문 오후 3시 15분에 멈춰있는 시계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의 입구에는 시계가 있다. 그 시계는 오후 3시 15분에 영원히 멈춰있다. 18세기 독일의 문화를 현재까지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는 바이마르의 도심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15분 미군에 의해 해방된 부헨발트는 그 이후 더 이상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 2024년을 살아가는 바이마르와 달리 이곳은 아직도 1945년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그만큼 나치독일은 독일 역사의 ‘파괴’를 상징했다. 문화를 꽃피운 독일문명의 현재성 속에 있는 바이마르에 문명단절의 공간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된 시공간은 어쩌면 지금의 독일을 만든 하나의 ‘공간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듯했다.

강제수용소에는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았다. 안락사가 이루어진 ‘의무실’, 시신을 불태우는 화장터 등 많은 요소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괴테의 참나무’가 서 있는 곳이었다. 괴테가 대작 ????파우스트????의 ‘발푸기르스의 밤’ 부분을 썼다고 알려진 이 참나무는 ‘위대한 독일’의 상징이었고, 그것이 나치독일이 이 나무를 남겨둔 이유였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지우면서 모든 나무를 밀어버렸지만 ‘위대한 독일 문명’을 상징하는 이 나무를 벨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이곳에서 ‘파괴’되었지만, 수많은 자연과 나무들이 강제수용소를 짓느라, 또 전쟁을 위해 ‘파괴’되었지만, 이 나무만은 괴테의 나무라는 이유로 그같은 참극을 피했다. 역설적으로 그 나무는 나치의 ‘위선’과 ‘폭력’의 상징처럼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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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산주의자 에른스트 텔만에 대한 추모 모습(좌), 괴테의 참나무(우)


강제수용소에서 인상 깊었던 마지막 장면은 에른스트 텔만이란 공산주의자를 추모하는 독일인들의 모습이었다. 나치 시기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수용했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에른스트 텔만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우상이자 상징이었다. 나치에 항거했던 그는 동독 시절 수많은 노래의 가사에 텔만이 들어갔고 동독 및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영웅이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에른스트 텔만에 대한 추모를 보면서 한국의 홍범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홍범도를 어떻게 기억해야하는지 얼마 전 한국 사회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한편은 독립운동가로서 홍범도, 다른 한편은 공산주의자로서 홍범도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했다. 부헨발트 내 에른스트 텔만에 대한 독일인들의 추모는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듯하다.

부헨발트를 뒤로 하고 떠난 행선지는 베를린이었다. 도이치반으로 2시간을 달려 도착한 베를린은 ‘역사도시’이자 ‘기억도시’였다. 베를린 곳곳에 보이는 수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은 조각상과 박물관, 건물 등은 프로이센, 나치독일, 분단독일이라는 3가지 역사적 시간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독일의 수도는 서울, 파리, 런던 등 여타 국가들의 수도와는 전혀 달랐다. 베를린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 그만큼 과거의 시간들이 편재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새로운 미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많은 참고서들이 현대 독일인들에게 도처에서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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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 대학교 로비에 써 있는 마르크스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번 테제


베를린의 첫 번째 행선지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였다. 훔볼트 대학을 먼저 간 이유는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가 세계 최초로 역사학과를 만든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을 창안한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로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반겼던 건 금색 판에 독일어로 쓰여있는 독일의 위대한 사회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번 테제였다.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aber darauf an, sie zu verändern”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이러쿵 저러쿵 해석해 왔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맑스의 외침은 사변을 넘어선 역사적 실천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켜 줬다.

훔볼트 대학을 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나치에 학살된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이었다. 한국에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로 더 잘 알려진 이 기념물은 정식 명칭에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학살된 독일 유대인들만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기념물이 아니다. 나치가 학살한 유대인은 ‘독일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내부의 전시에도 잘 볼 수 있듯이, 나치의 유대인 살해는 유럽 전역에서 이루어졌고,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만큼 홀로코스트는 독일만의 파국은 아니었고, 유대인만의 파국도 아니었다. 유럽 전역의 파국이었고, ‘유럽인’의 파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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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은 한국의 기념물과는 현격히 달랐다. 추모를 위해 지어진 공간이었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엄숙함도 없었다. 이 기념물을 지은 피터 아이젠만은 이곳을 종교적 건축물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 남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기념물들을 보자 한국의 용산 전쟁기념관과 춘천의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 앞의 수많은 추모 조형물들이 떠올랐다. 이곳의 추모비들은 전쟁을 기념하고 희생된 군인들을 기린다는 목적으로 장대한 건축물과 위용 넘치는 건축물을 배치한 한국의 것들과 너무나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모는 엄숙해야 하고 그들을 향해 절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과거에 대한 감정을 느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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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북역 인근 베를린 월 메모리얼의 베를린 장벽


훔볼트 대학을 뒤로하고 이튿날 찾아간 곳은 베를린 북역(Nordbahnhof)의 베를린 장벽이었다. 일반적으로 베를린 장벽 기념물로 가장 잘 알려진 이스트사이드갤러리와 달리, 이곳은 베를린 장벽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독일 분단의 아픔과 희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한 독일분단의 아픔을 가장 잘 느끼게 해주는 것이 베를린 월 메모리얼 파크 한 가운데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다 희생된 독일 민간인들의 추모비였다. 그곳에는 베를린 장벽을 건너려다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 하나하나가 놓여있었고, 많은 베를린 주민들이 분단의 아픔을 마주하고 추모하고 있었다. 이곳 역시 그 어디에도 추모의 장엄함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상 공간 속에서 우리가 자주 휴식을 취하는 ‘공원’처럼만 보이는 이 공간에 그런 비극의 역사적 서사가 더해지니, 독일 현대사의 아픔이 잔잔하지만, 더 오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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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에서 희생된 독일인들을 위한 추모공간


베를린의 북쪽 끝인 베를린 장벽에서 반대편이 남쪽으로 내려가면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인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지은 이 박물관은 공간이 어떻게 역사를 품을 수 있는지 보여준 홀로코스트 건축의 진수였다. 유대인 박물관의 외부 모습은 다윗의 별을 형상화했는데, 그것이 벼락에 맞아 완전히 찢어져 버린 형태였다. 외부 조형부터 유대인의 참극을 상징하는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는 투박한 철로된 거대한 건축물로만 느껴졌지만, 건물의 내부 서사를 본 후에는 그 무겁고 어두운 철근이 주는 역사적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물론 거기 어디에도 한국 같은 ‘감정의 강압’은 없었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 들어가면 사실 수많은 ‘전시’보다는 ‘공간’에 주목하게 된다. 3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첫 번째 층은 그저 공간만으로 어떻게 역사 속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첫 번째 축인 ‘연속의 축’은 출입구에서 다음 층의 전시 공간으로 이어지는 ‘연속의 계단’이 있다. 이 축은 유대인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축으로 나를 과거와 미래의 선택지 안에 위치시켰다. 두 번째 축은 ‘망명의 축’인데 그 끝에 가보면 49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망명의 공원’이 나온다. 이 망명의 정원 지면은 조금 기울어져 있는데, 울퉁불퉁한 이 정원을 걷고 있다면, 균형감각과 위치감각이 상실된다. 이런 ‘망명의 정원’은 끊임없이 탈출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감정을 보여주는데, 정원에서 계속되는 불편함은 당시 유대인들의 ‘불안’과 ‘초조함’을 잔잔하게 전달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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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홀로코스트 탑


마지막 축인 홀로코스트 축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나온다. 그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든 빛이 차단되어 캄캄한 가운데 천장에 뚫려있는 자그마한 천장으로 희미한 빛만이 들어오는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바깥의 차소리만 희미하게 들린다. 그 공간은 ‘절멸수용소’에서 절망적인 상황의 유대인들에게 아주 약간의 소리와 빛을 통해 꺼져가는 촛불같은 희망을 던져주는 듯하다. 거기서 느껴졌던 감정은 사실 지금도 잘 표현되지 않는다. 엄숙하지 않은 엄숙함?과 불안하지 않은 불안감?, 편안하지 않은 편안함?같은 모순된 형용사구로만 표현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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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낙엽


홀로코스트 축을 나와 연속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기억의 공백’이라는 장소가 나온다. 아무런 전시도 없이 그저 ‘공허함’으로 가득 찬 이 장소는 어떤 의미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기억의 공백’ 끝에 위치한 ‘낙엽’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철로된 사람의 일그러진 얼굴들이 낙엽처럼 쌓여있는 이곳은 걸을 때마다 짤그랑 짤그랑 소리가 났다. 이곳 역시 형용모순의 감정만이 느껴졌다. 말로 담을 수 없는 경험의 공간 그것이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 나에게 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건축은 언어는 세상을 담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언어의 한계 너머에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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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복도 속 글귀


이어지는 유대인 박물관의 전시는 수많은 유대인의 역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1789라는 숫자가 적혀있는 아주 작은 복도였다. 복도 위에는 여러 가지 현판들이 대각선 모양으로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프랑스 혁명의 수많은 인권 관련 글귀들이 적혀있었다. 현판은 양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자유, 평등, 형제애 등 수많은 혁명의 이념으로 가득 찬 정면의 현판과 달리 그 반대 면에는 그 혁명의 이념 속에 포함되지 못한 유대인 탄압의 역사적 글귀들이 적혀있었다. 프랑스 혁명기 속 인권을 부르짖었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기 ‘시민’은 오직 성인 남성만을 의미했다. 거기에는 여성, 아이, 외국인 등은 없었다. 그리고 ‘유대인’도 없었다. 독일을 떠나 피스투어의 마지막 여정지로 향했다.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독일 베를린만큼이나 수많은 역사적 유적지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베를린과 달리 빈에는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역사만이 오스트리아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 사이에 위치한 장엄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은 18세기 합스부르크의 제국으로 나를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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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유대인 광장 박물관 앞 홀로코스트 추모 조형물


그러나 빈 곳곳에 배치한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흔적과 달리 빈 유대인 박물관은 마치 나치시기 유대인들처럼 조그맣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빈 유대인 박물관에 들어서 3층 전시실에 가자 수많은 유대인 탄압의 역사들이 한가득 보였다, 그중 가장 삐까번쩍하게 빛나는 동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동판에 독일어와 함께 쓰인 영어 글귀를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I know of no greater plague than this race, whose deceit, unsury, and avarice are reducing people to beggars and who conduct all the disreputable transaction that would be abhorrent to an honest person, 나는 이 종족보다 더 큰 재앙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속임수와 불신과 탐욕으로 사람들을 거렁뱅이로 만들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혐오할 만한 모든 악랄한 거래를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Maria Theresia”.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세종대왕이고 이순신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이라면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이 행한 나쁜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정직하게 비판할 수 있을까? 아니 한국인들이 감히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이 그런 악행을 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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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유대인 박물관 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유대인 차별을 보여주는 동판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앞서 내가 던졌던 질문 “평화의 경험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평화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다음과 같다. “평화부재라는 역사적 경험과 현실은 평화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지만, 그보다 더한 극단적인 폭력의 경험은 우리를 평화실천의 영역으로 이끈다” 앞서 훔볼트 대학에서 보았던 칼 맑스의 테제는 철학자의 사변을 비판하며, 역사적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처럼 평화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라면 우리가 평화를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폭력의 상상하고, 기억하고, 마주하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2차세계대전의 참극 앞에서 누가 감히 전쟁과 폭력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동아시아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난징대학살, 관동대학살, 중일전쟁과 일본군 ‘위안부’, 한국전쟁과 보도연맹사건, 광주학살,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건 등 동아시아에는 수많은 폭력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에 우리가 제대로 마주했던 적이 있는가? 아니다.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면, 전쟁을 기념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는 척하면서 전쟁영웅 개개인만을 기리고 있다. 전시에서 군인들은 없고, 몇몇 영웅들만이 그려지고 있다. 민간인 학살은 어떤가? 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없고 오직 북한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거기에 기초해 북한과 중공군에 대한 적개심만 고조하고 있다.


이번 그랜드 피스투어에서 느낀 가장 큰 울림은 전쟁과 폭력의 역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독일의 수많은 기억공간은 형용모순을 통해서만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일상 속에서 전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길이다.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이끌어지고, 강제되고, 사유의 이분화가 촉진된다면 거기에는 평화가 없고, 오직 아적구분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기초해서 끊임없이 역사를 가지고 다투고 싸운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부헨발트는 문명과 파괴의 변증법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그려가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적 기억을 두고 싸우는 저마다의 ‘인정투쟁’이 평화적으로 재구성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이번 피스투어가 내게 남긴 새로운 질문이다.


글.사진 이용은( 2024 그랜드피스투어 1기 선발자/국제평화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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